여행자 와 식객

고려 서경파 개경파의 대립과 고려 역사이야기 본문

관심거리

고려 서경파 개경파의 대립과 고려 역사이야기

여행자와식객 2019. 2. 6. 23:24

혜종이 집권한 이후부터 고려 조정은 왕위 계승을 노린 정치적 암투에 휘말리게 된다. 권력 기반이 약한 혜종이 즉위하자 호시탐탐 정권 장악을 노리고 있던충주 유씨 세력과 서경파는 왕요 형제를 앞세워 혜종을 몰아내기 위한 총 력전에 돌입한다.

이 같은 왕요 세력의 팽창은 즉위 이듬해 혜종이 병을 얻자 더욱 가속화된 다. 왕요 세력은 종실을 대표하는 왕식렴과 평산 박씨등 ,  서경파, 왕요의 장인 박영규,충주 유씨 가문 출신의 관료들이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충주 유씨는 왕건이 왕위에 오른 후 첫 왕후를 배출한 호족이다.당시 왕권은 이미 두 명의 왕후를 두고 있었지만 제I비 신혜왕후 유씨는 출가하여 오랫동안 비구니로 머물렀기 때문에 자식이 없는 상태였고 제2비 장화왕후 오씨는 출신 가문이 한미하여 왕건의 왕권 강화에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또한 이들 두 왕후는 왕건이 왕으로 등극하기 이전에 혼인한 사이인 만큼 권력 구도 와는 큰 관계가 없었다.

그렇지만 충주 유씨 신명순성왕후는 왕권 구도에 지대 한 영향을 미치는 유력한 호족 출신이라는 사실 때문에 제3비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왕비였다. 신명순성왕후의 힘이 막강했다는 것은 왕건 자손들의 출생을 통해서도 확인 된다.장화왕후 오씨가 혜종 한 명만을 생산한 데 비하여 신명순성왕후는 5남 2녀를 생산했다.이는 왕건이 즉위 이후에는 장화왕후와 거의 동침하지 않았다. 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왕건은 즉위 이후에 호족 출신 왕후를 세 명 받아들이고, 신라왕조에서 한 명의 왕후를 받아들였다. 이 중에서 신라 왕조와의 혼인 관계는 권력 구도와는 무관한 의례적인 것이었겠지만, 나머지 세 왕후와의 결혼은 호족정책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특히 즉위 후 첫 번째 왕후를 충주 유씨 가문에서 얻었다 는 사실은 당시충주 유씨가 가장 강력한 호족 세력이었음을 대변하고 있다. 층주 유씨 다음으로 황주의 황보씨. 정주 유씨 등이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지 만 이들은 모두 경기 주변 세력으로 왕건의 세력권 네에 있었다. 따라서 황주의 황보씨나 정주의 유씨는 왕건이 충주 유씨를 견제하기 위해 내세운 호족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호족도 충주 유씨의 힘을 제압하지는 못했다. 왕건 의 견제정책이 있자 충주 유씨 역시 평산 박씨 등과 제휴하궤 종실 세력까지 끌어들여 여전히 조정 제네력으로 자리를 굳히고 있었다.

층주 유씨는 이 같은 강력한 세력을 과시하며 자신들의 외손 중에서 다음 왕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왕건이 이미 그들의 동태를 파악하고 박 술희와 왕규의 힘을 빌어 장화왕후 오씨 소생 무를 태자로 책봉해둔 상태엿다. 적어도 왕건이 살아있을 동안에는 이러한 권력 구도는 팽팽한 대럽 상태로 유 지되었다. 하지만 막상 왕건이 죽자 힘은충주 유씨 세력에게로 쏠렸다. 막강한 힘을 갖게 된 충주 유씨는 혜종을 몰아낼 계획을 세우게 되고 그들의 힘에 밀려 시름에 잠겨 있던 혜종이 병을 얻게 되자 외손 왕요를 왕으로 세우기 위해 세력을 집중한다. 왕건이 죽은 943년 당시 왕요의 나이는 21세였다. 혈기왕성한 나이였던 만큼 그 역시 왕위에 대한 욕망은 강했다. 왕요가 본격적으로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고 나서자, 종실에서도 그를 밀기 시작했다. 종실측은 왕요가 집권하는 것이 조정을 가장 안전하게 유지할 수 있는 길이라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종실세력을 이끌고 있던 사람은 왕식렴이었다.

그는 왕건의 사촌동생으로 서경세력의 핵심이었다. 서경세력은 왕건이 고려 건국 직후부터 평양을 서경으로 개성을 수도로 삼아 양경(兩料정책을 실시한 이후 형성되었다. 왕건은 평양을 서경으로 할 것을 정하면서 완전히 황폐해진 평양성을 복원하기 위해 주민을 이주시키고 사촌동생 왕식렴과 광평시랑 열평(평산 박씨로추측됨)을 보내 평양을 수비하게 한다.당시 평양엔 여진족들이 살고 있었는데, 왕건은 군대를 보내어 그들을 몰아내고 북진정책의 전초기지로 삼았던 것이다. 이 같은 왕건의 평양복원계획은 고구려의 고토회복 차원에서 이뤄졌다.

이는 고려가 고구려의 후계임을 알리는 가장 확실한 정책으로서 백성들을 하나 로 묶어내는 구심체 역할을 하였다.충청 이북 지방민들은 통일신라 통치 하에서도 고구려를 동경하였고 후삼국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을 땐 이것이 고구려 영토회복의 열기로 되살아났다. 궁예가 처음에 나라를 세웠을 때 국호를 후고 구려(또는 후고려) 라고 하였던 것도 고구려 유민들의 민심을 사로잡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궁예는 자신의 권력이 강화되자 후고구려라는 국호를 버리고 태봉이란 이름으로 독자적인 국가를 이루고자 하였다. 이 때문쎄 민심이 이반 되어 궁예는 결국 몰락의 길을 걷게 되고 왕건이 다시 고구려의 후계임을 자처 하며 고려를 세웠던 것이다. 따라서 왕건은 개경에 비록 왕성을 건설했지만 평양을 소흘히 할 수 없었다

그는 평양이 변방인 점을 감안하여 많은 병력을 배치하였으며, 자신이 몸소 평양을 시찰하여 919년 피월에 드디어 평양성 복원을 완료하였다. 왕건은 평양성이 복원된 이후에도 주기적으로 이곳을 방문하였으며, '훈요십조'에서도 후대의 왕들이 반드시 해마다 일정 기간 동안 평양성에 머무를 것 을 당부하고 있다. 왕건의 양경정책은 고구려 고토회복의 측면에서는 좋은 성과를 거뒀지만, 한펀으론 고려 조정을 둘로 갈라놓는 엉똥한 결과를 낳기도 했다. 혜종이 집권하자 박술희. 왕규 등의 개경파와 왕식렴, 평산 박씨 등의 서경파가 서로 대립하여 세력 다틈을 본격화하였고, 여기에 왕요를 앞세운 충주 유 씨 세력이 왕위계승권을 목표로 서경파에 가세하자 힘은 완전히 서경파 쪽으로 기울었다.

혜종은 개경파의 지지 속에 왕이 되었기 때문에 개경파를 중용하고 서경파 를 멀리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박술희를 대광에 앉혀 문무백관을 통솔케하고 왕규를 요직에 앉혀 서경세력을 견제하였다. 이에 따라 왕요 일파 및 서경파는 이 두 사람을 제거하는 일에 총력을 기울이게 된다. 이 과정에서 양쪽은 상대방 세력을 모함하며 정권 다툼을 일삼았고 고려 조정은 신하의 거의 절반을 잃는 결과를 초래한다. 서경파와 개경파의 대럽은 날로 심해지고 이 틈바구니 속에서 가까스로 왕 위를 유지하고 있던 혜종은 설상가상으로 병마에 시달리게 된다. 혜종이 병상에 눕자 자연스럽게 개경파의 힘은 약화되고, 이 때문에 개경파를 지원하던 청주 김씨 등의 증럽세력이 서경파로 발을 돌린다. 서경파는 마침내 개경파의 거두 박술희를 역적으로 몰아 귀양 보내고 죽이기에 이른다.

박술희가 살해당하자 왕규를 중심으로 한 개경파는 총력전에 돌입하지만 이미 힘이 너무 약화된 탓에 그다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그러던 차에 혜종이 임종하자 서경파는 무력으로 개경파를 제압하고 개경파의 거두 왕규를 귀양 보내 죽이는 데 성공한다. 혜종은 임종을 앞두고도 왕요를 후계자로 지목하지 않았다. 이는 혜종이 왕요에 대해 강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자신의 아들홍화군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혜종은 누차에 걸쳐 홍화군을 태자로 책봉하려 했겠지만, 그때마다 서경파는 흥화군이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반대하면서 홍화군보다는 왕요를 후계자로 세우는것이 조정의 안정을 위한 길이라고 역설했을 것이다. 하지만 혜종은 박술희. 왕규 등 개경파의 도움으로 서경파의 압력을 이겨낸다. 이 때문에 서경파는 박술희와 왕규를 제거하지 않고는 왕요의 왕위 옹럽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이를 미리 눈치 챈 왕규는 혜종에게 왕요를 제거할 것을 건의하지만 힘이 없던 혜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혜종은 자신의 후계자를 결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죽음에 이르게 되고 왕요는 별수없이 개경파를 완전히 제거한 이후에 서경파에 의한 추대 형식으로 왕위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가 바로 고려 제3대 왕 정종 이다.

Comments